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이를 전해들은 해담의 얼굴은 금세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요.” “…….” “얼굴에 적혀 있지 않아요? 완. 전. 건. 강.” “…….” “타. 고. 난. 건. 강. 체. 질.” 한자 한자 강세를 주어 말한 후 입매를 씰룩대는 얼굴을 보며 예림은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해담은 아홉시가 될 무렵에야 나타났다. 짤랑. 힘껏 잡아당긴 문 꼭대기에서 울려 퍼진 풍경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정확히 제 쪽을 향해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예림은 고개를 돌렸다. “…하….” 해담은 당황한 듯도, 조금은 성이 난 듯도 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래 기다렸죠.” “조금요.”...
산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에선 한낮에도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마주보이는 산등성이가 희다. 문득 시린 감각에 해담은 두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간밤 쏟아진 눈으로 뒤덮인 봉우리는 저마다 쨍한 빛을 머금고 있다. 해를 받아 반짝거리는 눈은 꼭 소금처럼도 보였다. 이맘때쯤이면 꼭 한 번씩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건 말건 그해의...
* * * 집들이에 한이라도 맺힌 양 내내 집들이 타령을 해댄 것이 허무할 정도로, 혜주는 소맥 세 잔을 채 비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학회 준비를 한답시고 며칠간 몸과 정신을 혹사시킨 결과였다. 평소답지 않게 술 몇 잔에 취해선, 남의 집에서 무방비한 행색으로 잠든 친구의 모습은 웃음보단 안쓰러움을 선사했다. 예림은 거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 * * 오전 컨퍼런스를 마친 뒤 김민주의 방에서 따로 갖는 티타임은 늘 선연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종류의 긴장감. 오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알았어. 지금은 손님이 있으니 이따 다시 얘기하지.” 뒤편에서 드문드문 이어지던 통화소리는 김민주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잦아들었다. 이내 제 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선연수는 등을...
오후 두 시.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무렵의 회사는 한산했다. 로비 한편에 자리 잡은 카페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빚어낸 소음만이 이따금 지루한 정적을 깨뜨렸다. 희미한 음악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메마른 기침소리. 하나둘씩 떨어지는 승강기 전광판의 숫자를 보다 말고, 예림은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코트 깃을 여몄다. 메마른 입안이 건조하다 못해 까끌까...
점심시간이 끝난 후 이어진 회의는 늘 얼마만큼의 나른함을 동반했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아니면 혼자만 모르는 건지. 두 눈 부릅뜨고 버티던 팀원들이 끝내 꾸벅꾸벅 조는 꼴을 보면서도 팀장은 매번 이 시간을 고집했다. 어찌 보면 상당한 악취미였다. “오늘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저녁이나 같이 했으면 싶은데. 스케줄이 다들 어떻게 돼요?” 회의가 끝나갈...
* * * 예림은 지금껏 제가 퍽 무지했음을 새롭게 깨달았다.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이 회사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줄을. 해담과 홍원경을 둘러싼 가십은 아침부터 사내 곳곳에서 술렁였다. 목격자가 이미 차고 넘쳤다. 다시 말해, 홍원경이 회사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예림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는 사실 같은 건 사람들 입에 ...
* 새드엔딩 반전이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이에요, 라비. 그동안 잘 지냈나요? 여전히 좋아 보이는군요. 그동안 잘 지냈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몇 년 전 라비가 리에게 보냈던,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메일이 마지막이었는데……. 네, 맞아요. 아주 짙은 눈썹을 가진, 라비보다 두 살 아래라는 그 남자 말이에요. 아아, 같이 살고 있군요. 다행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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